임진실 | Lim Jinsil


한남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작가노트

동네 안을 걷기만 하면 시선은 건물과 창문에 늘 머물게 된다.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는다. 언제나 그렇듯 이미지 파일은 창문과 건물들로 가득하다. 오래된 양옥집과 두껍게 페인트가 발린 대문과 낡은 창문들을 보며 저 집은 곰돌이네 집이라고 상상해본다. 문을 두드리면 곰돌이가 조금은 망설이다가 현관으로 나와 문을 열고 쑥스러운 얼굴로 맞이해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장난감이나 인형 따위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도 곰인형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게 된다. 그의 딱딱한 플라스틱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무슨 이야기를 할 것 같지만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무엇이라도 이야기 해보라고 손톱으로 플라스틱 눈동자를 딱딱 두어 번 쳐 본다. 이렇게 하면 아프겠네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불을 덮고 등져버린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만일 곰인형과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해 막연히 답답함을 느끼기 때문에 소통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막상 이야기 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나는 이내 피해버리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을 보든 낡은 집들과 창문에 곰돌이가 있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이미 머릿속은 낡은 집과 창문, 커튼 뒤에 숨은 곰돌이로 가득 차 있다. 갈라져 있는 커튼 틈으로 바깥풍경을 바라보는 곰돌이의 모습에서 생전에 녹음연주만을 고집했던 괴짜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연주를 떠올린다. 그는 공연장에서의 연주를 극도로 싫어했다.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환호를 혐오했으며 ‘일체의 감정의 표시 및 박수의 폐지를 위한 굴드안(案)’을 작성한 적도 있었다. 그는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을 싫어했다. 무엇에의 도달을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연주를 들으면 멜로디와 평행하지 않는 목소리가 들리곤 한다. 곰돌이의 소통의 시도와 외면은 외계와 교신하듯 간헐적으로 괴이하게 들려오는 그의 허밍처럼 알 듯 하다가 환영처럼 아른거리게 마음을 들쑤시며 증발해버린다.
창문의 커튼과 그 뒤로 가려진 집안의 풍경에 늘 눈을 뗄 수가 없다.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커튼에 가려진 화분의 실루엣을 본다. 시간마다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그 집안의 불빛을 본다. 보라색, 파란색으로 변했다가 이윽고 아주 밝은 하얀색이 되더니 이내 어두워지고 마는 풍경은 잠시 동안 걸음을 멈추게 한다. 언뜻 비치는 그 풍경은 구스타프 말러가 티치아노의 작품 ‘콘체르토’를 보고 이 작품에서 한없이 영감이 쏟아진다고 말한 것만큼이나 매혹시킨다. 그것은 낡은 것일수록 더욱더 그러하다.
어떤 것에 가닿기 위하여 소통을 원하고 또 피하기도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그저 열리지 않는 낡은 문을 망연히 바라보며 날마다 이미지를 수집한다. 언제쯤이면 내가 원하는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완벽하게 소통할 수는 없는 것만 같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는 것처럼.